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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 등 기독교 고전을 읽고

영광의 무게

이 글은 C.S 루이스저 "영광의 무게"  (홍종락 역, 홍성사 2014) 중 첫번째 글인 에세이 형식 설교를 필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영광의 무게'는  짧은 글이지만 사람들마다 이해하는 수준과 폭 또는 깊이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는 이 글이 좋은 글인 것은 맞지만 난해해서  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핵심 문장이 아닌 곳에서 더 큰 의미를 찾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영광의 무게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생소한 감이 있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 그 조합된 문구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혼돈이라 생각한다. 이 글이 그의 설교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죽음 이후의 세상은 있을까. 낙원은 존재할까.

 

누구에게나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지만 우린 이 질문을 애써 외면할 때가 많다. 기독교인들에게 조차 이 문제는 부담스럽다.  막연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보상을 받기 위한 신앙은 속물적"이라는 인식은 대표적인 비아냥의 예다. 루이스 역시 비슷한 상황을 인정한다. 대신 그는 신자로서 가질 수 있는 소극적인 태도는 오히려 잘못된 것임을 단호하게 지적한다.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고 간절히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현대인의 사고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것은 칸트와 스토아 학파의 사상에서 스며든 것이지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중략) ... 이런 보상의 약속을 근거로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상거래라고 말하더라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중략)... 천국을 기대하는 기독교인의 마음은 마치 그리스어로 쓰여진 시를 잘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과 가장 비슷합니다 (p.12~14)”

어쨋든 우리에겐  ‘갈망’이 있다.


채워지지 않는 내면 깊은 곳의 영적인 갈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 갈망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긴 연휴의 끝날 늦은 밤, 텅 빈 다운타운 거리를 지나며 느끼던 어떤 것은 아닐까. 이젠 어른이된 아이들의 어릴적 해맑게 웃는 사진을 꺼내보며 밀려오는 가슴시림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일까. 

루이스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너무나 가슴 아리는 비밀” 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한 번도 실제로 경험해 보지 못한 대상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고, 숨길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이 끊임없이 그것을 암시하고 있고 마치 상대의 이름만 들어도 표정을 감출 수 없는 연인처럼 그 갈망이 부지중 드러나기 때문”이다. 갈망이 고대하는 것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이고, 들어 보지 못한 곡조의 메아리이고, 우리가 아직 방문하지 못한 나라에서 온 소식” 이다. (p16-17)

갈망의 실체 - ‘아름다움’ 같은 어떤 것? 

아니다. 그가 지적했듯이 아름다움은 책이나 음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주어졌을 뿐이다.  "짦은 환상이 막 사라지거나, 음악이 끝나거나, 경치가 천상의 빛을 잃어갈 때” 우리는 그 영적 갈망을 알아채곤 한다. “잠시 동안 그 세계에 속했다는 환상에 젖었다가 문득 환상에서 깨어나 그렇지 않음을 발견” 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마치 소심한 소년처럼, 오랫동안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서러움을 쏟아낸다. 

“우리는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미소를 지었으나 우리를 반기는 미소가 아니었습니다. ... 그 달콤한 메시지가 한편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대부분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가 엿들은 내용인 듯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길을 달라고 감히 요청하지 못하고 갈망으로 수척해집니다. 이 우주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느낌...(p.27) “

혹자는 루이스가 존재론적 고독과 소외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접근은 식상하고 가슴에 와 닿지도 않는다. 차라리 영화 그래비티 (Gravity, 2013)의 한 장면처럼 깜깜한 무중력 공간에서 무기력하게 허둥대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어떨까. 환상적인 저녁 노을의 끝에서 씁쓸하게 돌아서는 우리들의 뒷 모습과 닮은 것은 없을까. 그의 표현처럼 "우리 몸은 전혀 그 아름다움에 접근조차 할 수 없고 흠뻑 공감할 수도 없는 머나먼 이방인에 불과함"이 적나라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현대 철학과 일부 신학은 마치 먼 훗날 결국엔 이 세상이 낙원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하지만 루이스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런 류의 주장은 과학적으로도 터무니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분명히 시작될 태양의 노쇠를 막지 못하는 한 공허한 망상일 뿐이라고 일갈한다.(p.18-19) 

결국 인간의 갈망을 해갈시켜줄 대안은 적어도 인간 자신에겐, 그리고 이 행성엔 없음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갈망이란 결국은 삶의 한계 속에서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비극적 필연일까. 

희망을 찾다 

그의 영적 스승 G.K 체스터턴이 그랬듯, 루이스는 세상의 보편성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추출해내는 탁월한 문학가적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갈망의 출구를 발견한다.

“낙원을 향한 제 갈망이 앞으로 제가 낙원을 누리게 될 것임을 보증하진 못하지만, 그 갈망은 어딘가 낙원이 존재하며 누군가는 그것을 누리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썩 훌륭한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를 반드시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란게 없는 세계에서는 ‘사랑에 빠진다’는 현상이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p.19~20)”


이 갈망에 대한 루이스의 분명한 논리는 그의 다른 저술물에도 등장한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한 신자의 입을통해서,  <예기치 않은 기쁨>에서는 그가 회심의 과정에 오르기 전까지 치열하게 씨름했던 사색의 경험으로서 소개된다. 루이스 덕에 우린 낙원의 존재의 당위성을, 성경을 펴지 않고서도 비기독교인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논리를 얻은 셈이다.  

이제 성경을 보자.

"성경은 천국에 대해 어느정도 밝혀주고 있고 ...중략... 천국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자연이나 멋진 노래도 아니고 성경이 그리는 것처럼 보석으로 가득한 곳도 아닙니다. 성경의 천국 이미지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다면, 권위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 중략... 그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천국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식어버렸습니다. (p.20)”  

성경이 제시하는 ‘권위적인 천국'의 이미지는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루이스의 용기있는 솔직함이 독자에겐 낯설기 보단 오히려 반갑게 들린다. 천국의 상급에 대해 언급하는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서 천국이 그런 '유치한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반신 반의했던, 스스로 고상한 지성인인체 하던 독자의 경험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독자와 달리 경박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동시에 당연히 그래야 할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짐작한 수준을 넘지 못하는 내용이라면 기독교가 내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동시를 이해한 소년에게 은유의 언어로 채워져 있는 시는 "지루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할 것”(p.21) 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루이스는 천국에 대한 성경의 약속들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정리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될 것입니다. 셋째, 엄청나게 풍부한 이미지로 보건대, 우리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잘 먹거나, 대접을 받거나,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우주에서 일종의 공식적인 지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들을 다스리고, 천사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입니다.(p.21)”

‘영광’과 겸손

루이스는 특히 ‘영광’에 대해 주목하며 글의 핵심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천국에서 우리가 영광을 얻게된다는 약속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다. 

“ 영광하면 명예 또는 광휘가 떠오릅니다. 명예의 경우, 유명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알려진다는 뜻이고, 명예욕은 경쟁심에서 나온 것이므로 제게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의 욕망으로 보입니다..” (p23) 

당시 영국은 물론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이미 유명인이 되어있던 루이스로서는 타인의 칭송을 많이 받는 사람이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라는 유혹에 대해 누구보다 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영광’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은 이해할 만 하다. 마치 신자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칭찬을 받아야 하지? 라고 정색을 하며 되묻는 듯하다. 그는 그런 태도가 신자로서 가져야 하는 겸손의 참모습으로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글의 주제와는 다소 멀지만 우린 이 대목에서 겸손을 향한 루이스의 결벽증 수준의 마음가짐을 보게된다. '순수한 겸손'과 '자화자찬의 교만'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추스리던 루이스의, 신앙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은 귀감이 된다. 어쩌면 루이스가 기독교인의 길을 가게 된 이후, 그의 삶을 정의할 수 있는 키워드 중에 ‘겸손’은 단연 으뜸의 자리에 있을 것이다. 루이스의 이같은 태도에 대해서는 그를 잠시동안 옆에서 지켜봤던 월터후퍼가, 같은 책의 편집후기에서 소개한 대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p.213-214)

그런데 루이스의 ‘영광’에 대한 다소 경직된 입장은 겸손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믿음의 전설들도 ‘영광’을 명예나 좋은 평판의 의미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의 의미를 재 발견한 것이다.  ‘영광’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겸손하고 가장 천진난만하고 가장 피조물다운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온 오해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그 순간의 기쁨은 “낮은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며 “짐승이 사람 앞에서,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학생이 교사 앞에서,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누리는 즐거움”이다. (p.24)

이로서 루이스는 ‘영광’은 겸손한 자가 받는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겸손한 자라는 역설을 발견한 셈이다. 비록 그 ‘기쁨'은 이내 ‘자화자찬’이라는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는 지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그런 변질이 일어나기 전 적어도 내가 합당하게 사랑하고 경외했던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는 '순수한 만족감'을 누리는 '지극히 짧은 순간'이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p.24). 

평생 시달린 향수(Life time nostalgia)- 갈망의 끝

즉 그것은 나의 선행으로 인해 상대방이 기뻐할 때 내게도 찾아왔던 ‘순수한 만족감’에 대한 또렸한 기억이며, 비록 그 아름다운 순간은 어느새 자화자찬이라는 습관 앞에서 흐트러지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내가 천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궁극적인 어떤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순간을 루이스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우리로선 생각도 못할 상황을 상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며  그 순간은 "구속받은 영혼이 자신의 창조 목적을 성취하여 창조주를 기쁘게 해 드렸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될 때 벌어질 상황입니다” (p.24)  

“그때 허영이 들어설 자리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구속받은 영혼은 그것이 자기가 이룬 일이라는 파렴치한 환상에 결코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중략)... 그날의 영혼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기 모습에 순수하게 기뻐할 것이고 오래된 열등의식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순간 교만은 바다 깊숙이 ..(중략)... 잠겨 버릴 것입니다”(p.25)

천국은 “하나님이 우리 등을 두드려 주시는 곳”이며, "이 영광의 약속은 우리의 깊은 갈망에 딱 들어맞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좋게 보심, 하나님이 받아 주심, 반응, 인정, 만물의 중심으로 환영받아 들어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생 두드렸던 문이 마침내 열리는 것입니다” (p.28) 

“우리가 평생 시달린 향수, 우리가 끊어져 나와 지금은 분리된 우주의 그 무엇과 재결합하고 싶은 갈망, 평생 바깥에서만 지켜봤던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갈망” 이 끝이나고 “마침내 안으로 불려 들어가는 그 일(p.29)”

루이스의 탁월한 통역을 통해 어느새 천국은 신자가 환상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낯선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성과 감정이라는 온전한 삶의 형식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상상할 수 있는 친근한 곳임이 드러나고 있는 듯 하다. 이쯤되면 천국은 우리의 희망 또는 소망의 수준이 아니라 갈망의 대상이다. 그의 이러한 진지한 천국관은 같은 책의 다른 글 <변환>에도 더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그의 천국에 대한 이해를 말해주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천국은 우리가 신성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이 온전히 실현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p.104, ‘변환')” 

영광의 무게 - 불편한 진실, 과분한 상급

그런데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울 수 있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우주의 궁극적 기쁨 혹은 궁극적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은 결국 둘 중의 한가지 표정으로 우리 각자를 대하셔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주시거나 치료할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 (p.25)” 이라는 성서의 엄중한 메시지다. 루이스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만약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관련이 없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p.26)” 고 일침을 놓는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설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마태7:23)”는 끔찍한 말씀을 듣게 된다면 “그 상황을 우리의 지성은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감성도 감당할 수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에서 쫒겨나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의 인식에서 지워질 수” 있고. "우리는 완전히 철저하게 ‘바깥에’ 남겨질 수...(p.29)”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관련한 궁극적 문제에 대해서는 적어도 인간 스스로는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루이스의 냉정한 인식은 옳다. 그렇다면 신자란, 일생을 그분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 하는 가련한 존재여야 할까. 

아마 그럴 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상관없다. 단, 그러한 삶의 태도가, 우리의 본성 속에 깊이 숨어있다가, 틈만나면 밖으로 뛰쳐나와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교만’을 비롯한 다른 못된 습관을 근본적으로 제압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대신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우리에게 믿기 어려울 만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만 가능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중 누구든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검사를 통과하고 인정받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거라는 약속입니다 (p.26)”

그리고 감격의 고백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행복에 실제로 기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니...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예술가가 자기 작품을 기뻐하듯, 아버지가 아들을 기뻐하듯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다니...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며 그 영광의 무게 내지 부담은 생각하기 조차 벅찰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p.26)”

“우리는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고, 환영받고, 영접받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중략)... 마침내 안으로 불려들어가는 그 일은 우리의 공로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영광이자 명예인 동시에 그 오랜 아픔을 낫게 해 줄 것입니다 (p.29)”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은 이 엄청난 특혜의 약속을 하신 것일까. 

다른 어떤 이유로도 합당한 설명을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약속임이 분명하다. 왜냐면 인간이든 신자이든 우리는 애초부터 우리 안에 존재의 원리조차 없었던 철저한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좀 더 솔직히 생각해보자. ‘신자’라는 사실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내게 주어진 인생의 여정에서 ‘잠깐’ 보여줬을 지도 모르는 ‘믿음'과 '믿음의 생활'이란 것이, 창조주 유산의 상속자로 ‘영원히’ 인정해 줘야 할 만큼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인가. 루이스는 마치 그런 도발적 질문들을 우리에게 넌지시 던지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이 베풀 영광은 우리에겐 벅차다. 그리고 그 무게는 우리가 내려갈 겸손의 저점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 틀림없다.

영광의 다른 의미 - 참 자유, 기쁨

영광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니 "우리는 해처럼 빛날 것이며, 새벽별을 받게될 것 (계 2:28)” 이라는 말씀의 의미도 더이상 생소하지 않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문 안으로 들어간 신자는 깜깜한 무중력 상태의 우주에서 허둥대며 고립을 두려워하는 초라한 이방인이 더이상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참 자유로움' 안에서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선물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루이스는 “거기 자연 너머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우리들에게는, 시와 신화는 읽는 순간에만 감동을 주는 환상이 아니며 오히려 구원받은 영혼이 누릴 현실의 디테일을 잘 서술한 참고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보는 아름다움과 연합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잠기고, 그 일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 p.30)”

 “성경의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새벽별을 주시고 태양의 광채를 입게하실 것을 믿는 다면 고대의 신화와 현대의 시들이 역사로서는 틀렸을지 몰라도 예언처럼 진실에 무척 가깝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p.31).” 

언젠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한편 이쯤되면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루이스의 설명은 지나치게 공상에 치우쳤다고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는 성경에 다소 추상적으로 서술된 진술들을 재료로 성경 안에서 그의 탁월한 논리와 상상력을 더해 보다 설명가능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 결코 그의 독창적인 신학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진수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는 사실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현재 우리는 그 세계의 바깥, 그 문의 바깥쪽에있어 아침의 신선함과 깨끗함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신선하고 깨끗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그 광채와 뒤섞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신약성경의 모든 나뭇잎들은 언제나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소문을 퍼뜨리며 바스락거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p.31)”

이런 시각과 믿음으로 이 세상을 다시 보면 “자연은 이미지요 다만 성경이 추천하는 상징"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자연은 필멸의 존재이지만 우리는 자연보다 오래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항성과 성운이 사라져 버린 후에도 우리 각 사람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이제 독자는 ‘새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몸'의 의미가 무엇인지 더 많이 알게된 듯 하다.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 나를 넘어

다 좋다. 그런데 추상이 현실이 된다는 기대의 흥분이 가시자마자 “영광의 면류관 이전에는 십자가가 있고 내일은 또 다른 한 주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오늘이라는 일상은 갑자기 변하지 않을 도도한 현실일 뿐이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표현대로 “이제까지 늘어놓은 영광에 관한 추측들이 예수님을 따라 오늘을 사는 데 무슨 효용이 있을까” 

이웃이다. 

이제까지 신자가 장차 누리게될 잠재적 영광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그 신자가 바로 우리의 이웃임을 알아야 하며,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의 정체를 온 몸으로 느끼고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린 그가 표현한 “완전한 겸손은 겸손을 표현할 필요를 없애줍니다 (p.25)” 라는 의미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웃이란 누구이며 그들의 정체는?

“평범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그저 죽어서 사라질  존재가 아닙니다. 국가, 문화, 예술, 문명과 같은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중략) ... 그러나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고, 같이 일하고, 결혼하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거나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입니다(p.34).” 

“우리의 오감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대상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이고, 그 다음은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 이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의 성찬만큼이나 거룩합니다. ...(중략)... 그의 안에는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자 영광을 받으시는 분, 영광 자체께서 참으로 숨어 계십니다 (p.34)”

맺으며

루이스의 많은 저술물 중 독자에게 가장 큰 감동과 영향을 준 글을 말한다면 지체없이 “영광의 무게” 와 “변환”을 꼽는다. 월터후퍼의 편집후기에 따르면 특히 ‘영광의 무게’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 포함될 수 있는 글이라는 극찬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는데 독자는 그 평가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진수를 현대인의 언어와 시각으로 정밀하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성직자 이외엔 어떤 저술가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그래서 더 친근감이 가는, 1세기 전을 살던 한 신앙의 거인이 이시대 신자들을 향해 보낸 편지다. 

너무 젊은 사람들에겐 이 글이 다소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면 죽음과 직결되는 천국을 소재로 한 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과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젊음과 늙음을 그 이유로 들기엔 궁색해 보인다. 나이에 관계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의 글을 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독자뿐일까. 나의 자녀 역시 언젠가 독자의 말에 동의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더이상 무엇을 바랄까. 그런 행복한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이 책(글)이 한국에서도 루이스의 명저로 꼽힐 수 있던 이유 중엔 훌륭한 번역자의 수고도 있을 것이다. 몇차례 이 글을 읽다가 영어 원문을 살펴본 후 느낀 솔직한 소감이다. (독자는 번역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주절이 주절이 외우고 싶은 마치 시의 한 부분같은 구절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데 만약 영어 원문으로만 읽었다면 아마도 루이스가 그 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미묘한, 문학적 감성이 담긴 신앙고백들을 덤덤하게 스치고 지나갔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프로번역가들의 번역을 비교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긴 하다. 왜냐하면 그 자체도 작품이기 때문이다. 홍성사의 번역본을 만난 것은 그러므로 행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