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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존재 가설의 귀환- 요약정리 (1) - 큰 질문

이 글은 Stephen C Meyer의 저서 Return of the God hypothesis (소현수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22) 를 읽은 후, 요약정리한 글이다.

이 책의 저자가 일관되게 제기하는 질문은 “이 세상, 즉, 이 자연세계는 과연 자발적으로 창발될 수 있었는가?” 이다. 이 질문은 결국 '확률'과 '개연성'의 문제로 귀착된다. 저자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대신 어떤 가설이 더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는지를 비교한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현대 과학에서 철저히 배척되어온 '초월적 지성을 전제로 한 가설'이 과학자들에 의해 다시 소환되고 있는 흐름을 주목한다.

다소 방대한 분량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서 독자의 언어로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큰 질문

세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우리가 속해있는 자연세계가 작동되는 원리들이 끊임없이 규명되고 설명되고 있지만, 설사 물리적 세상의 많은 수수께끼들이 대부분 풀리게 되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궁극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도대체 이 수수께끼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 질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은 결국 다음 두 가지의 가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자연세계의 원인은 자연 밖에 있다”

“자연세계는 스스로 존재한다”

현대 과학의 개척자들 예컨대 뉴턴, 보일,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등은 전자를 당연시 여겼고, 과학은 그 비밀을 탐구하고 밝혀내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몽주의 사조가 인류 문명의 전 부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과학계의 분위기도 급속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 과학계는 전자 즉 “자연세계의 원인은 초자연적 지성의 차원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가설 자체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는 전자의 가설 즉 ‘하나님 존재 가설’ 이 여전히 유효하며, 이 세상의 궁극적 기원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이 가설이 가장 우월적 위치에 있음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은 학문적 성과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자연계가 우연히 또는 자발적으로 (spontaneously) 조성되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가설들이 가진 치명적 결함들을 밝혀낸다.

이 책은 기독교 변증서가 아니다

제목이 가지는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이 책이 마치 개인의 신앙을 바탕으로, 과학적 사실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한, 과학을 빙자한 일종의 기독교 변증서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건 명백히 틀렸다. 저자는 과학철학자지만 이론적 접근이 아닌, 마치 실험실 연구생 수준의 시각으로 디테일에 접근해서 일반 독자의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과학사를 들여다보면, 계몽주의 시대 전후로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 이전의 과학계 - 유신론적 세계관

계몽주의 이전 유럽의 ‘현대 과학의 창시자’들은 초월적 지성의 설계, 즉 신의 관여를 전제로 세상을 이해했다. 예를 들어 보일의 경우 “자연세계는 마치 시계와 같이 시계공의 첫 설계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이며 그 설계된 법칙(자연법칙)은 신의 질서 있는 통치를 표현한다”고 이해했다. 뉴턴은 자연계 전체가 “지적이고 강력한 존재”의 설계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논문 [광학]에서 “눈이 광학 기술 없이, 귀가 소리에 대한 지식 없이 고안되었을까?..”라고 반문한다(p70).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등 현대 과학의 개척자들은 자연세계의 원인은 자연 밖에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초기 현대 과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제시한 발원지는 유대 기독교였다.

계몽주의 출현 이전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철학의 사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자연세계는 정밀하게 최적화된 자연의 법칙에 의해 유지된다
  • 자연의 법칙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 숨겨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 밝혀내는 게 과학자의 임무다.

계몽주의 이후

그런데 이런 사조는 계몽주의 출현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과학은 더 이상 유신론의 종속적인 전제로 존재하는 분야가 아닌, 유신론으로부터 독립해서 기능할 수 있다는 인식이 급속히 파급되었고 (볼테르, 꽁트), 점차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계시(종교적 믿음)를 상호 반대되는 개념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자연의 법칙의 근원은 설계자(신)에게 있다는 자연 과학계의 대전제가 부정되면서 ‘자연의 법칙’을 이유로 초자연주의가 거부되는 상황이 도래했다 (데이비드 흄. 경험주의).

흄은 ‘있으나 마나 한 신’ 즉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결코 자연에 개입하지 않거나, 따로 또는 식별할 수 있게 행동하지 않는, 멀리 떨어진 신적 존재일 것임을 시사했다. 신앙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계몽주의로 인해 생긴 치명적 변화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이성의 영역에서 밀쳐냈다는 것이다. 대신 ‘과학만이 과학적이다’라는 ‘과학주의’의 맹아가 태동된다.

계몽주의로 인해 생긴 치명적 변화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이성의 영역에서 밀쳐냈다는 것이다. 대신 ‘과학만이 과학적이다’라는 ‘과학주의’의 맹아가 태동된다.

 

계몽주의 영향 하에서 보여준 과학사조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세상은 원래부터 있었다 (궁극적 질문은 더 이상 필요 없다).
  • 자연의 법칙은 자연주의적 과학철학을 전제로 설명되어야 한다.
  • 자연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것 만이 과학적 사실이며 그러므로 초자연주의는 인정될 수 없다. (‘방법론적 자연주의’ 태동)

계몽주의의 완결 - 과학이 유물론적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시대 개막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감한 언급은 유대 기독교의 성서에서 비롯된다. 성서 창세기는 우주가 시작점이 있음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반면 동양 종교 예컨대 힌두교와 불교의 경전에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필자 주) 중세 이슬람교 학자들은 이미 우주 기원에 대한 유신론적 삼단논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1)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무엇이든 원인이 있어야 한다

(2)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3) 우주는 그것의 존재에 대한 원인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강력한 사조 하에서 유신론적 논증은 약화되거나 부정된다. 칸트는 “우주는 영원하고 무한할 가능성이 있다” 즉 우주는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무한한 정적 우주 모델 이론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저자는 계몽주의를 완결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세 인물이 있음을 지적한다. -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

“다윈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말했고,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했으며, 플로이트는 우리에게 인간의 본성과 우리의 죄책감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했다(p.86)”

다윈의 견해로는 비물질적인 마음, 아이디어 또는 계획을 가리키는 설명은 원칙적으로 적절한 과학적 설명이 될 자격이 없었다. (중략) 과학 이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다윈의 가정은 그가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또한 생물의 역사에서 창조적 지적 존재나 지적 설계를 불러오는 설명을 금지하는 새로운 방법론적 규범을 수립했다. 신적 존재에 의존하는 것을 금하는 규범은 19세기 후반과 그 이후에 유신론적 설계 논증을 거부하는 데 기여했다. (p.85)

경제학과 사회철학에서 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은 인간 본성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지극히 결정론적인 이해를 표현했다.

심리학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복잡하게 묘사하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하여, 마음의 서로 다른 요소들 및 각 부분의 생기를 주는 동기 또는 목표를 기술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놀랍도록 결정론적인 그림을 그렸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질적 필요와 비인격적인 경제적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묘사한 반면에, 프로이트는 행동이 주로 무의식적인 성적 욕망에 의해 지시되는 것으로 묘사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둘 다 하나님 가설에 대해 경멸감을 나타낸 무신론자였다. (86)

과학은 더 이상 자연의 증거를 설명하기 위해 물질을 만들어 내기 전부터 존재하는 지성적 존재를 불러올 필요가 없었다. 물질은 항상 존재해 왔으며, 사실상 이전부터 존재하는 설계자나 창조자 없이도 스스로를 배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 과학은 유신론적 세계관이 아닌 유물론적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였다. (p87) 

(to be continued)